
현대차, 기아 그리고 제네시스까지 현대자동차그룹이 엔비디아의 자율주행 개발 플랫폼을 자사 차량에 얹는다. 24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I 서밋에서 정의선 회장이 그룹의 피지컬 AI 구상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나온 내용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현대차가 밟는 이 길이 이미 여러 완성차 업체가 앞서 지나간 경로라는 점이다. 엔비디아 드라이브 진영의 지형도를 놓고 보면 이번 합류가 무엇을 바꾸는지가 더 선명해진다.
하이페리온 통합과 블랙웰 5만 개
이번 발표의 골자는 세 갈래다. 첫째는 양사가 함께 만드는 로봇 레퍼런스 플랫폼이고, 둘째는 블랙웰 GPU 5만 개를 동원해 통합 AI 모델을 훈련·검증·배포하는 인프라 구축의 확대다. 셋째가 자동차 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대목, 즉 엔비디아 드라이브 하이페리온을 현대차그룹 차량 플랫폼에 결합하는 작업이다.
하이페리온은 단품이 아니라 묶음이다. 차량용 고성능 연산 칩과 카메라·레이더·라이다 같은 센서, 차량용 운영체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스택을 하나로 엮은 형태다.

엔비디아 설명에 따르면 최신 하이페리온은 드라이브 AGX 토르 칩 두 개를 한 보드에 올리고 안전 인증을 받은 드라이브OS를 얹으며, 고화질 카메라 14개와 레이더 9개, 라이다 1개, 초음파 센서 12개로 구성된 센서 세트를 포함한다. 레벨 4 수준의 연산 성능과 이중화를 노린 구성이다.
정 회장이 그린 그림은 차량에서 멈추지 않는다. 개별 디바이스에서 출발해 물류·생산·품질을 AI로 잇는 AI 팩토리로 넓히고, 최종적으로 에너지와 모빌리티, 로보틱스를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도시 단위 지능화로 간다는 구상이다.
이미 줄 서 있는 브랜드들…진영은 생각보다 넓다
드라이브 AGX와 드라이브OS를 쓰는 곳은 이미 상당하다. 엔비디아가 지난해 초 공개한 명단만 봐도 BYD, 재규어랜드로버(JLR), 리오토, 루시드, 메르세데스-벤츠, 니오, 누로, 리비안, 볼보자동차, 와비, 웨이브, 샤오미, 지커, 죽스가 차세대 운전자 보조 및 자율주행 계획에 이 플랫폼을 채택했다. 여기에 토요타가 안전 인증 드라이브OS를 구동하는 드라이브 AGX 오린을 차세대 차량에 적용하기로 하면서 세계 최대 완성차 업체까지 합류했다.

부품사와 상용차 쪽도 있다. 마그나가 레벨 2~4 운전자 보조용으로 토르 칩을 투입하고, 콘티넨탈은 오로라와 함께 엔비디아 기반 레벨 4 트럭 양산을 준비 중이다. 최근에는 스텔란티스와 우버, 볼보그룹, 오로라, 와비 등이 최신 하이페리온 10 채택에 이름을 올렸다.
주목할 대목은 이 명단의 성격이다. 자체 칩과 자체 소프트웨어로 밀어붙이는 테슬라식 접근과 달리, 나머지 업계 대부분이 엔비디아 플랫폼 위에 자기 층을 올리는 방식으로 수렴하고 있다. 현대차의 이번 결정도 그 흐름 안에 놓인다.
볼보, 메르세데스-벤츠가 보여준 선행 사례
국내 소비자가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사례도 있다. 이달 국내에 출시된 볼보 ES90이다. 엔비디아 자료를 보면 ES90은 드라이브 AGX 오린을 두 개 얹은 구성으로, 볼보 차량 가운데 연산 능력이 가장 높은 모델이다.
볼보는 이 이중 오린 구성과 함께 안전 모델 훈련용으로 엔비디아 DGX 서버를 쓴다. 앞서 EX90도 드라이브 AGX 오린 기반으로 만들어졌고, 향후 차량군은 드라이브OS를 구동하는 토르로 옮겨간다.

벤츠는 한 발 더 나갔다. 엔비디아가 올해 CES에서 레벨 4 개발용으로 내놓은 추론 기반 시각-언어-행동 모델군 ‘알파마요’를 처음 양산차에 얹는 모델이 벤츠 CLA다. 현대차그룹 역시 알파마요 도입을 검토 대상에 올려둔 상태다.
정리하면 현대차가 들어서는 곳은 빈 땅이 아니다. 볼보가 오린으로 양산 검증을 끝냈고, 벤츠가 최신 소프트웨어 스택의 첫 사례를 만들고 있는 판이다.
자율주행 기술, 통합되면 무엇이 달라지나
현대차그룹 입장에서 실익은 개발 속도와 검증 체계에 있다. 엔비디아의 차량용 AI 컴퓨팅 플랫폼과 자율주행 레퍼런스 구조를 끌어다 쓰면 개발 기간을 줄이고 안전 검증 틀을 다질 수 있다는 점이 협의의 핵심 축으로 꼽혔다.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처음부터 다 짜는 대신, 검증된 하드웨어와 운영체제 위에 자사 기능을 올리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전략과의 맞물림이다. 주행 판단과 안전 기능, 인포테인먼트, 개인화된 AI 서비스를 차 안에서 처리하려면 고성능 차량용 AI 반도체가 전제 조건이 된다. 지금처럼 제어기가 차 곳곳에 흩어진 구조를 중앙 연산으로 모으는 작업에서 토르급 칩은 사실상 필수 부품이다.

세 번째는 센서와 소프트웨어의 한 묶음 도입이다. 하이페리온은 칩만 파는 게 아니라 센서 구성과 운영체제, 소프트웨어 스택까지 규격화해 제공한다. 차종별로 제각각이던 센서 배치와 검증 절차를 표준화할 여지가 생긴다.
넷째는 훈련 인프라와의 연결이다. 현대차그룹은 엔비디아의 차량용 반도체와 센서, 아키텍처를 자사 차량 플랫폼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자율주행 기술 고도화를 진행하고 있다. 블랙웰 GPU 5만 개 규모의 학습 환경이 차량에서 나온 데이터를 처리하고, 그 결과가 다시 차로 내려가는 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남은 쟁점은 ‘내재화’와 ‘병행 전략’
물론 따져볼 대목도 있다. 현대차그룹은 SDV 전환과 동시에 자율주행 기술 내재화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외부 플랫폼 의존도가 커질수록 내재화 목표와 어디서 선을 그을지가 과제로 남는다. 칩과 운영체제를 특정 공급사에 묶는 구조가 협상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업계가 오래 지적해온 문제다.

파트너 구성도 단순하지 않다. 현대차그룹은 엔비디아 외에 웨이모와 2024년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자율주행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해 협력 범위를 넓혀왔다.
이번 서밋에서 정 회장은 엔비디아와 웨이모, 구글 딥마인드를 함께 언급하며 AI 인프라와 제조 디지털 트윈, 자율주행 세 축에서 엔비디아와 손잡는다고 밝혔다. 로보택시 서비스는 웨이모, 차량 연산 기반은 엔비디아라는 이원 구조를 어떻게 굴릴지가 관전 포인트다.
진영 싸움의 무게추
이번 합류가 갖는 의미는 현대차 한 곳의 기술 선택을 넘어선다. 국내 최대 완성차 그룹이 엔비디아 진영에 이름을 올리면서, 자체 개발로 버티는 쪽과 공용 플랫폼에 올라타는 쪽으로 갈린 업계 구도에서 후자의 무게가 한층 무거워졌다.
볼보와 벤츠, 토요타가 앞서 만든 사례가 현대차, 기아 그리고 제네시스 차량에서 어떤 형태로 구현되는지가 다음 확인 지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