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진 소리로 정체성을 지켜 온 브랜드가 전기차를 내놓을 때 가장 큰 숙제는 성능이 아니라 감각이다. 벤틀리는 드럼과 비올라, 베이스 기타를 연주해 그 답을 만들었다.
벤틀리모터스는 영국 런던에서 순수 전기 도심형 럭셔리 SUV ‘토르칼(Torcal)’을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컨티넨탈 GT, 플라잉스퍼, 벤테이가에 이어 포트폴리오에 합류하는 네 번째 모델이자 브랜드 첫 순수 전기차다. 디자인부터 개발, 생산까지 전 과정이 영국 크루(Crewe)에서 이뤄진다.
프랑크-슈테펜 발리저(Frank-Steffen Walliser) 벤틀리모터스 회장 겸 CEO는 지난 107년간 벤틀리가 여유롭고 강력한 퍼포먼스와 안락함, 정교한 영국 장인정신, 영혼이 담긴 사운드를 갖춘 차를 만들어 왔다며, 토르칼이 그 본질을 이어가면서 브랜드를 정의해 온 모든 영역에서 새 기준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네 가지 ‘리드’로 설계한 디자인
로빈 페이지(Robin Page) 벤틀리모터스 디자인 총괄이 이끄는 크루 디자인 팀은 차의 디자인이 한 번에 인식되지 않고 시각적 위계에 따라 단계적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보고, 이를 네 가지 ‘리드(Read)’로 정리했다.

첫 번째는 비례감이다. 긴 휠베이스와 짧은 오버행, 당당하게 세운 전면부로 ‘수직적 우아함(Upright Elegance)’을 구현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보닛(Endless Bonnet)’ 원칙을 더해 길이감을 강조했다.
두 번째는 그래픽 요소다. 전면부에는 컨티넨탈 T 등 상징적 모델에서 영감을 받은 요소를 일루미네이티드 다이아몬드 그릴로 재해석했고, 후면부에는 EXP 15 콘셉트카에서 처음 선보인 ‘명예로운 방패(Prestigious Shield)’ 원칙을 적용했다.

세 번째는 표면 언어다. 불필요한 선을 덜어내고 면과 비율로 캐릭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뒤로 갈수록 좁아지는 캐빈과 리어 휠 위 볼륨을 강조한 ‘헌치(haunches)’ 라인이 대표적이다. 디자인 팀은 이를 ‘휴식하는 맹수(Resting Beast)’로 표현한다. 네 번째는 디테일로, 다이아몬드 패턴이 선명하게 혹은 추상적으로 곳곳에 배치됐다.
토르칼은 지난해 공개된 새 벤틀리 윙 엠블럼이 처음 적용되는 양산 모델이기도 하다.
실내 구성과 시트 사양
실내는 벤틀리 윙 엠블럼에서 영감을 받은 대시보드가 대칭성과 균형감을 강조한다. 가죽과 울, 베니어, 알루미늄의 질감을 드러내는 구성이며, 널링 마감 조작장치와 새롭게 해석한 불스아이 송풍구가 적용됐다.

센터 콘솔과 스티어링 휠에는 주요 기능용 물리 버튼을 유지했다. 터치스크린으로 기능을 몰아넣는 최근 흐름과 반대되는 선택인데, 조작 불편에 대한 소비자 불만이 누적된 시장 상황을 고려한 판단으로 보인다.
시트는 16방향 전동 조절과 열선, 통풍, 조절식 볼스터, 마사지 기능을 기본 적용했다. 선택 사양인 자세 조정 기능과 스마트 시트 클라이밋은 장거리 주행 중 시트 형상과 압력 분포, 열선·통풍을 지속적으로 조절한다.

웰니스 시트 스펙을 고르면 마사지 영역이 시트 쿠션까지 확장된다. 뒷좌석에는 벤틀리 최초로 전동 폴딩 3인승 시트가 들어간다.
휠은 다섯 가지 디자인으로 제공된다. 기본형에 21인치, 토르칼 S에 10-트윈 스포크 22인치가 기본이며, 공기역학 전용 디자인을 포함한 22인치 옵션 세 가지를 고를 수 있다.
파워트레인과 배터리, 충전 성능
토르칼에는 영구자석 동기식 모터 두 개가 들어간다. 두 모터 모두 교환이 필요 없는 오일을 채운 드라이 섬프 방식이며, 전륜에는 오픈 디퍼렌셜, 후륜에는 각 출력축에 다판식 클러치를 갖춘 록킹 디퍼렌셜이 적용된다.

고전압 배터리는 직렬 연결된 192개 리튬이온 파우치 셀로 구성되며 정격 전압 800V, 총 순용량 113kWh다. 보증은 10년 또는 10만 마일(약 16만1,600km)이다. WLTP 기준 최대 주행거리는 600km이고, 400kW 급속 충전 시 10%에서 80%까지 16분이 걸린다. 7분 충전으로 161km를 확보할 수 있다.
풀 액티브 서스펜션과 섀시 제어
벤틀리 최초의 풀 액티브 서스펜션과 어댑티브 2-밸브 댐퍼가 적용됐다. 각 댐퍼가 노면과 조작에 즉각 반응해 독립적으로 차체를 제어하며, 안티 롤 토크를 능동 제어하기 때문에 별도의 안티 롤 바가 필요 없다. 안티 롤 바는 좌우 바퀴를 물리적으로 연결해 롤을 억제하는 대신 한쪽 바퀴의 충격이 반대쪽에 전달되는 단점이 있다. 이를 없애면 승차감과 자세 제어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전자제어식 올 휠 스티어링이 전 모델 기본이며 뒷바퀴를 최대 5도까지 조향한다. 회전반경은 11.1m다. 전장 약 5m 차량으로는 좁은 수치로, 도심형 SUV를 표방한 만큼 주차와 골목 주행을 염두에 둔 설계다.
제동은 전륜 420mm, 후륜 370mm 철제 디스크가 기본이고, 선택 사양인 카본 실리콘 카바이드(CSiC) 세라믹 브레이크는 전륜 440mm, 후륜 410mm다. 캘리퍼 색상은 기본 3종에 뮬리너를 통한 추가 3종을 고를 수 있다.
공간과 주행 보조 기능
전장 약 5m로 벤틀리 4도어 라인업 중 가장 짧지만 트렁크 460ℓ와 전방 수납공간 90ℓ를 확보했다.
차량에는 레이더와 센서, 카메라 25개가 탑재된다. 좁은 도로에서 장애물을 만나면 이미 인식해 둔 지점까지 자동으로 후진해 통행 공간을 만든다. 견인과 차고 주차, 평행 주차 보조로 휠 손상을 방지하고, 앱을 통한 원격 주차와 정밀 주차 동작 학습도 지원한다.

네 개 도어에는 레이더 기반 전동 개폐 기능이 적용돼 안전벨트 착용이나 터치스크린 조작, 브레이크 페달 조작으로 문이 닫힌다. ‘프로스티드 다이아몬드(Frosted Diamond)’ 스위처블 글라스 선루프는 실내 유입 광량을 조절한다.
벤틀리 다이내믹 심포니와 오디오
개발 팀은 벤틀리 V8 엔진 사운드의 매력이 리듬에 있다고 보고, 드럼과 비올라, 베이스 기타 등 실제 악기 연주로 미세한 변주와 불완전성까지 담은 ‘벤틀리 다이내믹 심포니(Bentley Dynamic Symphony)’를 만들었다. 저주파 사운드는 운전자가 요구하는 토크와 차량 속도에 따라 조정되며, 스포츠 모드에서는 볼륨이 커지고 완전히 끌 수도 있다.

전기차 가상 사운드는 대부분 합성음이나 엔진음 샘플을 변형해 만든다. 실연주 음원을 기반으로 삼은 것은 엔진음 모사를 포기하고 별도의 청각 언어를 만들겠다는 접근이다. 방향지시등 소리는 벤틀리 가죽 공방에서 망치로 가죽을 두드리는 소리를 녹음해 만들었고, 터치스크린과 디지털 어시스턴트 알림음에는 크리스털 글라스에서 채취한 소리를 썼다.
오디오는 16스피커 620W가 기본이며, 네임(Naim)과 공동 개발한 28스피커 1,780W 시스템을 선택할 수 있다. 네임 오디오는 시트 촉각 피드백과 앞좌석 헤드레스트 스피커, 돌비 애트모스 7.1을 지원한다.
익스피리언스 모드와 디스플레이
네 가지 익스피리언스 모드(Experience Mode)는 조명과 사운드, 공조, 공기 흐름, 디지털 정보를 함께 조율한다. 벤틀리 모드는 균형 잡힌 기본 설정, 컴포트 모드는 자극을 최소화하고 필수 정보 외 화면 표시를 줄이는 ‘디지털 디톡스’를 제공한다. 스포츠 모드는 사운드 몰입감과 시각 집중도를 높이고, 리프레시 모드는 외부 공기 순환량을 늘리고 조명을 밝게 조절한다.

벤틀리 전용 커브드 OLED 디스플레이가 적용됐고, 안면 인식으로 운전자를 식별해 시트와 스티어링 휠 위치, ADAS 설정을 불러온다. 스마트폰을 차 키로 쓰는 모바일 디바이스 키와 증강현실 헤드업 디스플레이도 지원한다.
메리노 울과 뮬리너 소재
벤틀리 컬러·소재·마감 팀은 18세기부터 고급 울 직물을 만들어 온 영국 서머싯의 폭스 브라더스(Fox Brothers)와 협업해 세계 최초의 100% 메리노 울 차량용 패브릭을 개발했다. 이 소재는 차량용 울 패브릭 최초로 ‘책임 있는 울 표준(RWS)’ 인증을 받았다. 가죽 일변도였던 럭셔리 인테리어에 울을 대안으로 세운 시도로, 동물성 소재 사용에 대한 소비자 인식 변화를 반영한다.

‘옴브레 월넛 바이 뮬리너(Ombré Walnut by Mulliner)’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확보한 월넛 자투리 목재와 재활용 크래프트 페이퍼를 최대 1,000겹까지 압착한 뒤 1mm 미만으로 재단해 만든다. ‘선버스트 알루미늄 바이 뮬리너(Sunburst Aluminium by Mulliner)’는 과거 엔진 턴드 알루미늄 대시보드를 3방향 브러시 패턴으로 재해석했다.
인테리어 선택지는 올리브 태닝 가죽 15종과 대응하는 디나미카(Dinamica) 15종, 순수 메리노 울 5종, 우드 6종, 테크니컬 피니시 2종, 피아노 피니시 6종이다.
토르칼과 토르칼 S
기본형 토르칼은 최고출력 821마력, 최대토크 121.7kg·m(1,194Nm)를 내고 0→100km/h 가속 3.4초, 최고속도 250km/h다. 토르칼 S는 런치 컨트롤 활성화 시 최고출력 888마력, 최대토크 137.7kg·m(1,350Nm)로 0→100km/h 2.9초, 최고속도 260km/h를 기록한다.

기본형에는 새틴 실버 외장 디테일과 싱글 톤 컬러 스플릿, 오픈 포어 크라운 컷 월넛이 적용된다. 토르칼 S는 블랙 외장 디테일과 미러 캡, 다크 리어 램프, 프런트 범퍼 바디킷, 스포츠 사이드 실과 리어 디퓨저, 레드 브레이크 캘리퍼, S 펜더 배지와 블랙 윙 배지, 전용 컬러 스플릿과 퀼팅, 스포츠 페달, 피아노 블랙 베니어, 일루미네이티드 트레드플레이트, 다이내믹 ‘워터폴’ 무드 라이팅을 갖췄다.
마틴 페이지(Martin Page) 토르칼 제품 라인 총괄은 기술이 벤틀리의 본질을 지배하지 않고 그 가치를 강화하도록 개발했다며, 럭셔리와 정교함, 여유로운 퍼포먼스 등 브랜드를 정의해 온 요소를 한층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벤틀리는 토르칼로 순수 전기부터 내연기관, 하이브리드까지 아우르는 ‘선택의 럭셔리’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 초고급 브랜드의 전동화가 수요 둔화로 일정 조정을 겪어 온 가운데, 전기차를 기존 라인업 대체가 아닌 추가 선택지로 배치한 구성이다. 국내 출시 시점과 가격은 이번 발표에 포함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