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데이터센터의 병목은 칩이 아니라 전기로 옮겨가고 있다. GPU 수만 개가 동시에 연산을 시작하고 멈출 때마다 전력 수요가 급격히 출렁이고, 전력망은 그 충격을 받아낼 완충장치를 필요로 한다. 엔비디아가 그 완충장치의 공급 파트너 명단을 처음 내놨고, 국내 배터리 기업 가운데 LG에너지솔루션이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LG에너지솔루션은 엔비디아(NVIDIA)가 처음 선보인 ‘DSX 레디(DSX Ready)’ 프로그램에 BESS(Battery Energy Storage System,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 기업으로 합류했다고 22일 밝혔다. 이번에 BESS 파트너로 선정된 기업은 전 세계 3곳이다.
엔비디아 DSX 레디 프로그램의 구조
AI 팩토리는 AI의 생명주기 전반을 관리하며 데이터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도록 설계된 고도화된 데이터센터다. 엔비디아는 AI 팩토리의 설계부터 구축, 운영까지 통합·최적화하는 DSX AI 팩토리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으며, DSX 레디는 이 플랫폼의 요건을 충족하는 파트너 제품과 솔루션에 부여하는 자격 프로그램이다.
같은 날 LG전자도 대용량 냉각수 분배장치(Coolant Distribution Unit, CDU)로 DSX 레디 요건을 충족해 합류했다. 전력 저장과 냉각이라는 데이터센터 인프라의 두 축에서 LG 계열사가 동시에 엔비디아 생태계에 들어간 셈이다.
엔비디아가 칩을 넘어 데이터센터 전체를 표준화하려는 흐름에서 이 프로그램의 성격이 드러난다. 서버를 사도 전력과 냉각이 받쳐주지 못하면 AI 팩토리는 가동되지 않는다.
검증된 인프라 공급사 명단을 제시하는 것은 고객의 구축 기간을 줄이고, 엔비디아 플랫폼 중심의 생태계를 전력·냉각 영역까지 넓히는 전략이다. 반대로 파트너 기업에게는 초대형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의 초기 설계 단계부터 후보군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된다.
JF2 AC Link의 제품 구성
LG에너지솔루션이 요건을 충족한 제품은 고용량 LFP(리튬·인산·철) 기반 ‘JF2 AC Link’다. AC 에너지저장솔루션에 적용되는 DSX 레디 요건을 통과했다.
제품은 높은 안전성과 에너지 효율, 장수명을 갖췄고, 모듈형 설계로 건설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데이터센터 규모가 커지는 속도에 맞춰 단계적으로 용량을 늘릴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데이터센터용 ESS에서 LFP가 선택되는 이유는 열 안정성이다. 삼원계(NCM) 배터리보다 에너지 밀도는 낮지만 열폭주 위험이 작고 수명이 길다. 설치 공간 제약이 차량보다 덜한 고정형 저장장치에서는 밀도보다 안전성과 수명이 우선이고, 서버 수천 대가 모인 시설에서 화재 위험을 줄이는 것은 보험과 인허가 측면에서도 결정적인 요소다.
AI 부하 평준화와 계통 형성 기술
제품 경쟁력의 핵심은 PCS(전력변환장치) 기반 전력 제어 기술이다. AI 서버의 급격한 전력 사용량 변화에 맞춰 충·방전하며 부하를 완화하는 ‘AI 부하 평준화(AI Load Smoothing)’ 기능을 갖췄다. 전력망 전압이 급격히 떨어지거나 오를 때도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전압 유지(Voltage Ride-Through)’ 기능도 강화했다.
전압과 주파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전기 공급이 불안정할 때도 ‘계통 형성(Grid-Forming)’ 기술로 전력 공급을 유지하는 제어 역량도 갖췄다.
AI 학습 작업은 기존 데이터센터 부하와 성격이 다르다. 수많은 GPU가 연산과 통신 단계를 동시에 오가며 전력 소비가 짧은 주기로 크게 출렁인다. 이 진동이 그대로 전력망에 전달되면 발전 설비와 송배전망에 부담이 되고, 전력회사는 대형 데이터센터의 계통 연결을 꺼리게 된다.
ESS가 이 변동을 흡수하면 데이터센터는 전력망에 매끄러운 부하로 보이고, 계통 접속 승인도 수월해진다. 계통 형성 기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ESS가 스스로 전압과 주파수 기준을 만들어 전력망 역할 일부를 대신하는 기능이다.
북미 현지 생산과 IRA 세액공제
LG에너지솔루션은 북미에서 5개 ESS 생산거점을 운영하며 셀부터 팩, 링크까지 ESS 전 제품을 100% 현지에서 생산하고 있다. 올해 말까지 북미 ESS 생산능력을 50GWh 이상으로 늘린다는 방침이다.
현지 생산은 적기 공급과 함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투자세액공제(ITC) 혜택을 고객에게 제공하는 근거가 된다. 미국 내 ESS SI(시스템통합) 법인 버테크(Vertech)를 통해 배터리 설계부터 운영, 유지보수까지 통합 솔루션도 지원한다.
글로벌 ESS 시장은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LFP 배터리 기업들이 주도해 왔다. 미국에서는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관세와 세액공제 요건이 강화되면서 현지 생산 역량이 곧 가격 경쟁력이 되는 구조로 바뀌었다. LG에너지솔루션이 셀 단위부터 미국에서 생산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기차 수요 둔화로 북미 배터리 공장 가동률 관리가 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ESS 전환은 생산 설비 활용도를 끌어올리는 해법이기도 하다.
북미 AI 데이터센터 ESS 수주 현황과 전망
블룸버그 뉴 에너지 파이낸스(BNEF)에 따르면 미국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은 지난해 180TWh에서 2030년 391TWh로 2배 넘게 늘어날 전망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미 AI 전력 수요와 연결된 대형 계약을 확보해 왔다. 5월에는 오라클(Oracle) 등의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미국 유틸리티 기업 DTE에너지와 총 6GWh 규모 ESS 배터리 공급계약을 맺었다. 7월에는 구글과 사이프레스 크릭 에너지(CCE)의 태양광·ESS 프로젝트에 배터리를 공급하기로 했다.
다만 이번 발표에는 함께 선정된 나머지 BESS 기업 2곳이 공개되지 않았다. DSX 레디 자격이 실제 수주로 얼마나 이어질지도 앞으로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자격 프로그램은 후보군 진입을 의미할 뿐, 최종 공급사 선정은 데이터센터 사업자와 전력회사가 가격과 공급 일정을 따져 결정한다.
강창범 LG에너지솔루션 ESS전지사업부 전무는 엔비디아가 처음 선보인 DSX 레디에 파트너로 합류한 것이 AI 데이터센터에 최적화된 제품 경쟁력을 입증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어 현지 생산 역량과 기술 리더십을 바탕으로 AI 인프라 사업 영역을 넓히고 성장을 가속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