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에서 SK온이 5년치 물량을 한 번에 확보했다. SK온은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SK온 관훈캠퍼스에서 미국 에너지저장장치 기업 네오볼타 파워(NeoVolta Power)와 배터리 셀 공급계약을 체결했다고 8월 31일 밝혔다.
체결식에는 최대진 SK온 ESS사업실장과 스티브 본드(Steve Bond) 네오볼타 파워 사장 등 양사 관계자가 참석했다.
계약에 따라 SK온은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간 총 9기가와트시(GWh) 규모의 리튬인산철(LFP) 파우치 배터리 셀을 공급한다. 공급 물량은 SK온의 미국 조지아주 공장에서 생산된다. 네오볼타 파워는 조지아주 팬더그래스(Pendergrass)에 생산시설을 둔 에너지저장장치 제조 기업으로, 미국 에너지 기술 기업 네오볼타의 자회사다.
하이니켈에서 리튬인산철로, 제품군 다변화의 실질적 성과
이번 수주의 핵심은 배터리 화학 구성의 전환에 있다. SK온은 그동안 전기차용 하이니켈 배터리를 주력으로 삼아왔다. 에너지 밀도가 높아 주행거리 확보에 유리한 대신 원가 부담이 크다는 특성을 가진다. 반면 에너지저장장치는 차량과 달리 무게와 부피 제약이 크지 않다. 고정형 설비에서는 kWh당 단가와 수명 사이클이 성능 지표를 앞선다. 리튬인산철이 이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이유다.
SK온이 리튬인산철 파우치 셀을 앞세워 이 계약을 따냈다는 것은, 하이니켈 중심 포트폴리오를 넘어선 제품 다변화가 실제 수주로 이어졌다는 뜻이다. 네오볼타 파워가 선보일 리튬인산철 파우치 기반 제품의 핵심 셀 공급사로 선정되면서 기술 경쟁력과 현지 생산 역량을 동시에 확인받았다.
조지아주 생산과 가동률 개선, 고객 다변화 효과
물량을 미국 현지에서 생산한다는 조건은 계약 성사의 배경 가운데 하나다. 미국 에너지저장장치 시장은 세액공제 요건과 공급망 규제가 촘촘하게 얽혀 있어, 현지 생산 여부가 프로젝트 수익성을 직접 좌우한다. SK온이 조지아주 공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협상 테이블에서 작동한 셈이다.

SK온은 단독 공장인 SK배터리아메리카와 SK온 테네시, 현대자동차그룹과의 합작 공장 HSBMA를 합쳐 약 100기가와트시 규모의 현지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다만 전기차 수요 둔화 국면에서 이 설비를 채울 물량 확보가 과제로 남아 있었다. 5년간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9기가와트시 공급 계약은 가동률을 끌어올리는 직접적인 수단이다. 전기차 고객사에 집중된 매출 구조를 분산하는 효과도 함께 따라온다.
총 18GWh 규모로 확대되는 사급·팩 구매 구조
양사는 협력 범위를 에너지저장장치 사업 전반으로 넓히는 방안도 추진한다. SK온은 연내 별도 계약을 통해 추가로 9기가와트시 규모의 리튬인산철 셀을 사급 구조로 제공하고, 네오볼타 파워가 전문성을 갖춘 팩 제품 형태로 다시 구매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검토하고 있다. 이 방안이 성사되면 양사 협력 규모는 총 18기가와트시로 확대된다.
사급 구조는 셀 판매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SK온이 셀을 공급하고 완성된 팩을 되사오는 방식은, SK온이 팩 단위 제품을 자체 브랜드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경로를 만든다. 셀 제조사에 머무르지 않고 시스템 공급자로 올라서려는 시도이며, 팩 조립 설비 투자 없이 파트너의 제조 역량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자본 효율도 확보한다.
최대진 SK온 ESS사업실장은 이번 계약이 미국 에너지저장장치 시장 내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현지 생산 역량과 고객 수요에 맞춘 배터리 솔루션을 기반으로 신규 고객과 사업 기회를 계속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스티브 본드 네오볼타 파워 사장은 SK온의 배터리 기술력과 미국 내 생산 역량, 네오볼타 파워의 제조 역량이 이번 협력의 기반이라며 미국 내 늘어나는 수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내 중앙계약시장 284MW와 그리드온 브랜드 전개
SK온의 에너지저장장치 사업 확대는 국내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 2월 발표된 국내 제2차 ESS 중앙계약시장 입찰에서 전체 565메가와트(MW) 가운데 284MW를 확보했다. 전체 물량의 50.3%에 해당하는 규모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9월 재생에너지 개발사 플랫아이언과 1기가와트시 규모 공급 계약을 맺었다.
브랜드 정비도 병행했다. SK온은 지난 6월 미국 텍사스에서 업계 고객 초청 행사를 열고 에너지저장장치 제품 브랜드 ‘그리드온(GRIDON)’을 소개했다. 전력망(Grid)을 켠다(On)는 의미를 담은 이름으로, 전력망 안정화를 통해 에너지 전환에 기여한다는 사업 방향을 반영했다. 지난해 1기가와트시에서 이번 9기가와트시, 나아가 18기가와트시 협력 논의로 이어지는 수주 규모의 확대 곡선이 이 브랜드 전개와 맞물려 움직이고 있다.